타인의 마음을 손끝으로 읽을 수 있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정말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구병모의 소설 <절창>은 '상처를 만질 때 타인의 기억이 흘러든다'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인물을 내세워, 인간을 마치 하나의 '읽을 수 있는 텍스트'처럼 제시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곧 우리에게 역설적인 진실을 건넵니다. 타인을 온전히 해석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며, 오해와 왜곡은 관계 속에 필연적으로 스며드는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불가해성을 직면할 때, 인간 존재의 진정한 깊이가 비로소 드러난다고 이 작품은 조용히 말을 겁니다.
소설 속 주인공(이름 없이 ‘아가씨’라 불립니다)은 보육원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 우연히 자신의 능력을 자각하게 됩니다. 타인의 상처에 손을 대면 그 사람의 기억과 감정이 밀려드는 것이죠. 언뜻 보면 이 능력은 타인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초월적 통로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이 설정을 통해 오히려 반대의 진실을 드러냅니다.
상처가 생긴 그 순간의 감각과 정서는 전달되지만, 그 이전의 맥락이나 이후의 의미는 결코 온전히 포착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누군가의 손목에 남은 자해의 흔적을 만졌을 때, 주인공은 그 절망의 감정을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 후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알 수 없지요. 결국 주인공이 마주하는 것은 타인의 ‘전체’가 아니라 ‘조각’이며, 그마저도 자신의 해석이라는 틀을 통해 재구성된 파편적 이야기일 뿐입니다.
“타인의 상처를 읽어야만 했던 아가씨에게 책이란 그것을 넘겨 보는 것만으로도 한 존재를 덮는 궁륭이 되어주지 않았을까요 ”
이번주 대중이 책(Book)에서 택한 트렌드 한 문장(북택트)은 '불완전한 독해'가 관계에 어떤 균열을 만드는지 보여줍니다. 주인공은 타인의 상처를 읽으며 그들을 이해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정작 상대방은 자신이 감추고 싶었던 과거를 침범당했다고 느낍니다. 이해는 소통이 아니라 침입이 되고, 공감은 때로 폭력으로 전환됩니다.
주인공의 능력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사업가 오언과의 관계에서입니다. 오언은 그녀의 능력을 발견하자 곧바로 이를 자신의 목적에 활용하려 합니다. 그는 주인공을 보호하고 특별한 대우를 해주지만, 그 배려는 언제나 계산과 이해관계 속에 얽혀 있습니다. 주인공은 오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부합니다. 친밀함과 거리감, 신뢰와 불신이 교차하는 이 관계는, 타인을 읽고자 하는 욕망과 불가해성 사이의 긴장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절창>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깊은 울림은,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결핍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확신하는 순간, 그 사람의 고유한 존재는 우리의 해석 속에 갇혀버립니다. 진정한 관계는 상대를 완벽히 해독하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원히 다 알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 불투명함 속에서도 함께 머무르려는 의지에서 생겨납니다. 이해의 폭력을 멈추고 타자성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누군가와 진정으로 마주설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이번 주 북택트 문장은 다음과 같이 준비해봤습니다.
Q. 나는 누군가를 '이해했다'고 말할 때, 정말 그 사람을 보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내가 구성한 이야기를 보고 있는 걸까요?
<절창>은 조용히 속삭입니다. 타인은 영원히 불가해하며,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러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불가해성이야말로 우리를 단순한 정보의 집합이 아닌, 고유하고 존엄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고. 완전히 이해받지 못한다는 두려움을 내려놓고, 불완전한 연결 속에서도 서로 곁에 머무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관계의 문턱을 넘어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