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월,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도돌이표를 그립니다. 토익 수험서와 역사 관련 도서가 소설과 에세이를 제치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죠. 누군가는 이 목록을 보며 "대한민국은 역시 삭막한 입시 공화국이야"라고 혀를 찰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문학적인 시선으로 이 풍경을 다시 보면, 조금 다른 감정이 피어오릅니다. 그 투박하고 두꺼운 수험서들은 단순히 지식을 담은 종이 뭉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우리가 스스로에게 건네는 가장 무겁고도 거룩한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의 얼굴은 의외로 소박합니다. 꿈을 말하지도 않고, 삶의 방향을 묻지도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속삭일 뿐입니다. “이것만큼은 준비해 두자.” 토익 단어장, 그중에서도 기출 보카는 가장 최소 단위의 언어입니다. 문장을 만들 필요도 없고, 생각을 덧붙일 여지도 없습니다. 외우고, 확인하고, 넘기면 됩니다.
이 책이 매년 1월 어김없이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른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더 이상 거창한 미래를 상상하지 않는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대신, 지금의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붙잡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손잡이를 찾고 있다는 신호에 가깝습니다.
“DAY 01 백수탈출 채용”
이번주 대중이 책(Book)에서 택한 트렌드 한 문장(북택트)는 30일 동안 기출 단어를 외우도록 편집한 토익 보카의 첫 장의 제목입니다. 저는 이 제목을 보면서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배움의 기쁨'이나 '세계로의 도약' 같은 낭만적인 수사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탈출'이라는 절박한 단어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토익 책 옆에 나란히 놓인 역사책의 존재는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이것은 차가운 현실(토익) 옆에 따뜻한 인문학(역사)이 놓인 낭만적인 풍경이 아닙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역사책 역시 한국사 능력 검정 시험 대비를 위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목록에서 희망을 읽고 싶습니다. 비록 그것이 점수를 위한 공부일지라도, 기꺼이 그 지루하고 고단한 과정을 감내하겠다는 수많은 사람의 의지가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단어를 외우고, 문제를 풀고, 시간을 견디며 각자의 기준을 지키려 애쓰는 이들 앞에서 우리 각자는 무엇을 기준으로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 주에는 이런 질문을 여러분과 나눠보고 싶습니다.
Q. 지금 당신의 'DAY 01'에는 어떤 소제목이 붙어 있나요?
책에 적힌 제목은 '백수 탈출'이나 '합격'일지 모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자꾸만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라고, 빨리 이 불안한 상태를 벗어나라고 재촉하니까요. 하지만 저는 우리가 스스로 적어 넣는 마음속 소제목만큼은 달랐으면 좋겠습니다.